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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성사 작성일16-10-06 12:41 조회143회 댓글0건

본문

 

< 大乘六情懺悔 >

 

釋元曉撰

 

若依法界始遊行者 於四威儀無一唐遊 念諸佛不思議德 常思實相杇銷業障 普爲六道無邊衆生 歸命十方無量諸佛

 

1>

<解釋>

만약 法界을 의지하여 두루 격으면서 수행할려고 하는 者라면 行住坐臥 어느 것에도 헛되이 유행해서는 않되는 것이니, 모든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덕을 항상 잊지말고 알아차리며, 항상 실상을 생각하여 업장을 녹이며, 두루 六道의 가없는 중생을 위하여 시방의 무량한 모든 부처님께 귀의하여야 한다.

 

(講說)

법계를 의지한다는 것은 적어도 깨달아야만이 법계를 의지할 수 있다. 중생교화와 상구보리를 말한다.

法界란 무엇인가? 만일 여러분이 詩人이라면 여러분은 이 손바닥 안에서 구름이 흐르고 있음을 볼 것이다. 구름이 없이 비가 없으며, 비 없이 마시는 물을 구할 수가 없다. 물이 없다면 이 손바닥 속의 血液이 강물이 흐르듯이 흐르지 않을 것이다. 손바닥의 血液과 흐르는 구름과 分離되어 있지않듯이 森羅萬象의 온 우주가 이 손바닥과 한번도 분리되어 따로따로 되어 본적이 없다. 만일 분리되어 있다면 현재 이순간의 손바닥은 사라져서 있지않아야 할 것이다.

이 손바닥과 관련되지 않는 것이 없다. 따라서 이 손바닥에 흐르고 있는 물이 否定될 때는 온갖 물이 부정하는 것이요, 물이 부정되면 구름이 부정되고, 이 구름에 의한 비와 그것에 의지하여 자라는 나무를 부정하게 되고 나무는 우리에게 산소를 공급하는데 나무가 부정되므로 우리는 결국 생존할 수 없다.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존재할 수 앖다. 이러한 일은 온 세상에 생기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한번도 분리되어 본적이 없는 緣起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손바닥 안을 더욱더 깊이 들어다 보면 그 안에 있는 한 방울의 血液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구름, 나무, 햇빛, 산소, 땅 등등이 그물과 같이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있다.

말하자면 重重無盡의 宇宙法界가 손바닥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음을 발견하게된다. 그러므로 法性偈는 一中一切 多中一라고 說하는 것이다. 雪岑은 이 偈頌에 이렇게 말한다.

 

所以는 自性을 지키지 아니하여 緣을 따라 이루기 때문이니 一法이 自性

이 없기 때문에 一切를 갖추어 一을 이루는 것이요 一切法이 自性이 없

기 때문에 一法으로써 一切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一 가운데

一切이어서 多가 一에 걸리지 않고 一切 가운데 一이어서 一이 多에 걸

리지 않는다. 이러한 즉 터럭끝에 三世諸佛이 곳곳에서 衆生을 濟度하며

가 없는 刹海에 一切衆生이 낱낱이 涅槃하거니와 터럭 끝이든 刹海이든

` 空花 가운데의 境界요 諸佛이든 衆生이든 夢幻 가운데의 物色이다. 譬喩

하자면 虛空이 비록 一切에 두루하되 또한 一塵을 여의지 않음과 같으니

虛空이 建立하는 바의 消息을 알고저 하는가.

「처마에 기대인 山色은 구름에 이어져 푸르르고 난간을 벗어난 꽃가지는

이슬을 둘러 향기롭다.」 (大華嚴一乘法界圖註幷序)

 

이것이 그대로 제석궁전의 寶網과 같다. 제석천의 궁전을 莊嚴하는 網은 각각 코마다 寶珠가 붙어서 각각의 코에 달린 보주는 다른 一切의 보주의 그림자를 비치고 그 하나하나의 그림자 속에 다른 일체의 그림자가 비치는 것처럼 무한히 交錯되어 反映되고 있다. 말하자면 帝網을 비유로서, 모든 존재는 個體와 全體가 거듭 거듭 다함이 없이 서로 서로가 융합하고 서로간에 緣이 되어 현상계가 유지됨을 말한다. 그대로 법계의 성품을 말한다. 이것이 華嚴經夜摩天宮偈讚品에 覺林菩薩이 第10 偈頌 응당 法界의 성품 위에라고 한 것에 해당한다.

 

 

 

諸佛不異而亦非一 一卽一切一切卽一 雖無所住而無不住 雖無所爲而無不爲 一一相好一一毛孔 遍無邊界盡未來際 無障無礙無有差別 敎化衆生無有休息 所以者何 十方三世一塵一念 生死涅槃無二無別 大悲般若不取不捨 以得不共法相應故

 

2>

<解釋>

모든 부처님은 다르지 않으나 또한 하나가 아니다.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이다. 비록 머무르는 바가 없으시나 머물지 않음이 없으시고 비록 하시는 바가 없으시나 하지 않으시는 것이 없으시다. 낱낱의 모습과 낱낱의 털구멍이 끝이 없는 법계에 두루하고 미래의 시간이 다하도록 걸림이 없으시고 막힘이 없으시며 차별도 없이 중생을 교화하시기 위해 휴식이 없으신다. 왜냐하면 시방삼세의 한 티클 한 생각과 생사와 열반이 차별이 없다. 大悲와 般若로 취하지도 안고 버리지도 않는다. 함께하지 않는 법(不共法)을 얻어서 相應하기 때문이다.

 

(講說)

부처님는 중생교화를 쉬임없이 하는 것을 말한다. 단지 부처님이 법이므로 이 법에 따라 중생교화함을 보인다.

모든 존재는 緣起하는 것이므로 하나라고 하면 잘못이다. 왜냐하면 존재의 個個가 차별의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르다고 하면 또한 틀린다. 왜냐하면 존재 개개가 다르다면 상호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서로가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서로 서로 관계로 맺어져 있을 뿐이다. 즉 연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도 아니고 同時에 다르지도 않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부처님은 다르지도 않으나 또한 하나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例를 들자면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만일 부모와 자식이 같다고 한다면 부모에 의해서 자식이 이 세상에 태어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부모와 자식이 하나로서 같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이고 자식이 부모이므로 여기서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까닭이다. 또 만일 부모와 자식 사이가 전혀 다르다면 역시 부모에 의해서 자식은 태어날 일이 없다. 왜냐하면 부모와 자식과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다. 모든 존재는 부모와 자식과의 사이 처럼 緣起할 뿐이다.

부처님의 몸(法身)은 華嚴經夜摩天宮偈讚品에 行林菩薩이 第1 偈頌 비유컨대 十方世界에 일체 모든 땅의 種姓이 자체의 성품 있는 것이 아니지만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듯이제2>게송에서 부처님의 몸도 이와 같아 모든 세계에 널리 두루하여 가지가지 모든 빛깔과 형상이 머문 곳도 온 곳도 없네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第1偈頌과 第2偈頌은 法性偈의 不守自性隨緣成, 즉 自性을 지키지 않고 緣을 따라 이룬다라고 함과 같다. 雪岑은 이 法性偈에 註釋하기를

 

一切法은 본래 無性이요 一切性은 본래 無住이니, 無住이면 無體요 無體

이면 緣을 따라 걸리지 아니하고 緣을 따라 걸림이 없기 때문에 自性을

지키지 아니하여 十方과 三世를 이루는 것이다. 自性이란 諸法이 相이

없이 본래 淸淨한 體이니 아는가. 「去年의 梅花에 今年의 버들이니 顔色

과 聲香이 모두 예와 같구나」(去年梅에 今年柳여 顔色과 聲香이 摠依舊

로다) (大華嚴一乘法界圖註幷序)

 

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단지 여기서는 이러한 부처님의 몸과 대비하여 중생은 중생이 된 이유을 業때문이라고 정의하고 業이 모든 형상을 만든다고 한다. 물론 衆生의 自性과 부처의 自性은 본래 같음은 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그 자성은 無性이므로 自性을 지키지 않고 無明業에 따라 중생이 된 것이다.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이 不守自性은 부처이든 중생이든 관계없이 貫通하는 眞理이다.

 

 

今於此處蓮花藏界 盧舍那佛坐蓮花臺 放無邊光 集無量衆生 轉無所轉大乘法輪菩薩大衆遍滿虛空 受無所受大乘法樂

 

3>

<解釋>

지금 이곳 연화장에서는 노사나불이 연화대에 앉으시어 끝없는 빛을 발하시어 수 많은 중생을 모아 놓고 설할 것 없는 대승법을 펴시며 허공을 꽉 메운 많는 보살대중도 누릴 것 없는 대승법락을 받아 누린다.

 

(講說)

 

 

 

 

而今我等同在於此一實三寶無過之處 不見不聞如聾如盲 無有佛性何爲如是 無明顚倒妄作外塵 執我我所造種種業 自以覆弊不得見聞 猶如餓鬼臨河見火

 

4>

<解釋>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하나의 實在(즉 一心)가 三寶인 아무 허물없는 여기에 함께 자리하면서도 보도 듣도 못함이 장님, 벙어리나 다름없으니 佛性이 없음인가. 어찌 이러한가. 無明으로 顚倒되어 허망하게 바깥경계를 짓고서 我所를 집착하여 갖가지 을 짓고 스스로 () 덮히고 가리워져서 보도듣도 못하게 되었으니 마치 餓鬼가 강에 다달으나 물이 불로 보이는 것과 같구나.

 

(講說)

 

業은 「造作之意」라고 한다. 우리는 관념적인 것들을 서슴없이 사물화한다. 즉 唯識佛敎에서는 이것에 대하여 관념은 사물이다라고 한다. 물론 관념이 사물이라고 한 이 사물은 추상적인 것이다. 때문에 본래적인 존재가 아닌 이차적존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관념화돤 사물이 실재 존재하는 事物과 類似할뿐, 同質的인 것은 아닌데도 불구하고.우리는 동질적인 것으로 착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관념 개념 사상 견해등은 언어문자에 의한 정보를 감각기관을 통하여 받아들여서 우리의 마음이 대상을 임의대로 조작하고 구성시키는 능력에 의한 것이다. 이 힘을 카르마 즉 業 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 카르마는 현재에만 작용하는 것만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계속 이어져오면서 반드시 결과를 가져온다. 카르마가 작용하고 머물 수 있는 장소가 마음 가운데 최심층의 마음 즉 阿賴耶識이라한다. 말하자면 無意識에 해당한다고나할까. 우리의 마음은 카르마가 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연상작용의 창고일 뿐만아니라 모든정보를 처리하고 카르마를 만들어내고 저장하는 창고이다. 그 기능은 과거에 보고 듣고 느끼고 사유한 것만이아니라 사상 철학 사랑 우정등 다양한 과거로부터의 모든 정보(개념)가 매모리되어 있다. 이와같이 메모리되어 있은 것을 業種子라고 한다. 그리고 현재의 모든 언어활동에 의한 개념적인 것도 그대로 메모리가 된다. 마치 콤퓨터에 각종 정보를 입력시키면 그 정보들이 계속 없어지지 않고 저장되어 있듯이 우리의 마음도 그와같은 힘이 있다. 컴퓨터의 키- 보드을 치면 입력되어 있던 각종의 정보가 화면에 떠오르듯이 우리의 마음에 메모리되어 있는 과거로 부터 입력되어 있는 印象도 대상을 인식하므로서 그에 맞는 잠재되어 있는 인상이 나타나서 그 인식의 내용 즉 대상화한 관념을 이룬다. 이러한 대상화한 관념의 내용이 곧 카르마이다. 뿐만아니라 여기서 대상을 인식할 때 매모리되어 있는 업종자가 영상화되면서 우리의 사회 국가 문화 등과 그리고 자연계까지 구성하고 조작하면서 展開된다.

인간의 카르마는 현재에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전쟁을 예로 든다면 과거의 무수한 전쟁의 경험이 無意識에 印象으로 潛在되어 있다가 전쟁이란 현재의 결과를 가져온다. 걸프전쟁의 경우가 예고된 전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역사적으로 무수히 이어온 것도 그러한 이유이기도하다

모든 것은 우리의 業에 의하여 認識의 增幅을 가져 오고 대상을 왜곡시키는 것때문이다. 그러나 業의 근저에는 존재의 참모습이 연기하는 不二임을 모르는 無知가 도사리고 있다. 그러므로 無知는 起信論에서는 「분리되어 있지않는 거듭 거듭 다함이 없는 세계 (一眞法界)를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故今佛前深生慚愧 發菩提心誠心懺悔 我及衆生無始以來無明所醉 作罪無量 五逆十惡無所不造 自作敎他見作隨喜 如是衆罪不可稱數 諸佛賢聖之所證知 已作之罪深生慚愧 所未作者更不敢作

 

5>

<解釋>

그러므로 이제 부처님 앞에 깊이 부끄러운 마음과 깨닫겠다는 마음을 내어 지성으로 참회합니다. 저와 중생이 시작없는 때로부터 無明에 취하여 지은 죄가 너무 많읍니다. 五逆十惡을 골고루 짓되 내 스스로 짓거나 남을 시키거나 또는 남이 저지르는 것을 함께 좋아했으니 이렇게 많은 죄를 헤아릴 수 없읍니다. 모든 부처님과 성현들이 증명해 주소서. 이미 지은 죄는 깊이 부끄러운 마음을 내고 아직 짓지 않은 것은 감히 다시는 짓지 않겠습니다.

 

(講說)

 

□此諸罪實無所有 衆緣和合假名爲業 卽緣無業離緣亦無 非內非外不在中間 過去已滅 未來未生 現在無住 故所作以其無住故亦無生 先有非生先無誰生 若言本無及與今有 二義和合名爲生者當本無時卽無今有 當今有時非有本無 先後不及有無不合 二義無合 何處有生 合義旣壞散亦不成 不合不散非有非無 無時無有對何爲無 有時無無待誰爲有 先後有無皆不得成 當知業性 本來無生 從本以來 不得有生 當於何處得有無生 有生無生俱不可得言不可得亦不可得 業性如是諸佛亦爾 如經說言 譬如衆生造作諸業 若善若惡 非內非外 如是業性非有非無亦復如是

 

6>

<解釋>

(그러나) 이 모든 죄는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뭇 緣이 화합한 것을 거짓으로 業이라고 이름했을 뿐이니 緣에 卽해서도 緣을 떠나서도 業의 實性은 없다. (業을 짓는 者의) 안에 있지도 않고, 밖에 있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중간에 있지도 않다. (시간상으로) 過去는 이미 없어져 버렸고, 미래는 아직 생기지 않았으며, 현재는 머무름이 없다. 그러므로 지어가고 있는 행위도 머 무름이 없고 따라서 남(生)이 없다.

애초에 有라면 生이라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애초에 無이니 어찌 生이 있겠는가. 만약 本無와 今有 둘이 화합된 것을 生이라 한다면, 本無일 경우는 今有가 없거나 今有일 경우는 本無가 없어야 한다. 先과 後가 만나지 못하고 有와 無가 合하지 않아서 두 뜻이 합해지지 않으니 어느 곳에 生이 있다 하겠는가. 合의 의미가 이미 깨어져 散의 의미도 또한 성립될 수 없으니 合도 아니고 散도 아니며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니다. (다음으로) 無일 경우는 有가 없으니 무엇을 상대하여 無가 되며, 有일 경우는 無가 없으니 무엇에 기대어 有가 성립하겠는가. 先後와 有無가 모두 성립되지 않는다.

마땅히 알아라. 業性은 본래 無生이라 본래부터 生이 있을 수 없으니 어느 곳에 生이 없다함이 존립할 수 있겠는가. 有生과 無生이 모두 될 수 없고 「될 수 없다」는 말조차 설 수 없다. 의 성품이 이렇듯이 諸佛의 성품도 마찬가지다. 經에서 說하는 바와 같다. 「비유하면 중생이 業을 만들어 지으니 혹은 善하고 혹은 惡하지만 (이 사람의) 안에 있지도 않고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듯 업의 성품은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니다.」고 하니 또한 이와 같다.

 

(講說)

業의 본질, 즉 업의 성품이 無生임을 말한다. 즉 본래 생김이 없다는 것이다. 생김이 없다는 것은 업에 의해서 만들어 진 형상은 없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어디에도 볼 것이 없다.」 이것은 제6>偈頌의 부처님의 몸도 이와 같아서이다. 때문에 원효스님은 의 성품이 이렇듯이 諸佛의 성품도 마찬가지다.라고 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업에 의해서 만들어진 중생의 몸과 부처님의 몸이 다르다. 그러나 이렇게 업의 만들어 내는 성품의 본질이 「본래 비고 고요하다」(第4偈頌)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 있다. 즉 이렇게 알아차리면, 중생의 몸도 부처님의 몸과 다르지 않고 같은 法性으로서 법으로서 몸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렇게 바르게 알아차림을 닦아 읶혀서 바르게 깨어있음(正覺)이 마음속 형상없고 대상에 분별 업으면 이름을 法王子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行林 菩薩은 부처님의 몸이 온 우주에 두루하다는 것을 밝히는 데, 부처님의 몸이 無住處, 無來處임을 중생의 業으로 만들어진 몸과 잘 대비하여 보여준다. 그러나 결국 중생의 몸도 無住處, 無來處임을, 업의 본질을 잘 관찰하여 알아차림으로서 똑 같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렇게 正覺한 사람을 法王子라고 하여, 이러한 法王子야말로 부처님을 바르게 찬탄함을 밝히고 있다고 생각된다.

華嚴經夜摩天宮偈讚品에 行林菩薩이 曰,

3> 단지 모든 때문에 4> 의 성품 본래 비고 고요하나

衆生이라고 이름하나 중생들이 依止하는 곳이며,

또한 중생을 떠나서 이 여러가지 두루 형상을 만들지만

을 얻을 수 없나니라. 또 다시 온 곳이 없음이로다.

5> 이와 같이 業이 만든 모든 형상과

業의 힘은 생각으로 알 수 없으니

그 근본을 환히 알아차리면

그 가운데 어디에도 볼 것 없네.

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단지 여기서는 이러한 부처님의 몸과 대비하여 중생은 중생이 된 이유을 業때문이라고 정의하고 業이 모든 형상을 만든다고 한다. 물론 衆生의 自性과 부처의 自性은 본래 같음은 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그 자성은 無性이므로 自性을 지키지 않고 無明業에 따라 중생이 된 것이다.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이 不守自性은 부처이든 중생이든 관계없이 貫通하는 眞理이다.

 

本無今有非無因生 無作無受 時節和合故得果報 行者若能數數思惟如是實相而懺悔者 四重五逆無所能爲 猶如虛空不爲火燒 如其放逸無慚無愧 不能思惟業實相者 雖無罪性將入泥梨 猶如幻虎還呑幻師 是故當於十方佛前 深生慚愧而作懺悔 作是悔時莫以爲作 卽應思惟懺悔實相所悔之罪旣無所有 云何得有能懺悔者 能悔所悔皆不可得 當於何處得有悔法

 

7>

<解釋>

본래 없던 것이 지금에 있게 되어 까닭없이 생기지 않았다. 지을 것도 받을 것도 없지만 시절이 화합하기 때문에 과보를 받는다. 만일 이렇게() 실싱을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참회하는 자는, 四重五逆罪를 지었다 해도 아무런 일 없으니 마치 불이 허공을 태우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만약 방일하여 부끄러워할 줄 모르며 業의 實相을 생각하지 못하는 자는 비록 罪의 성품이 없다고는 하지만 장차 지옥에 떨어질 것이니, 마치 마술용 호랑이가 도리어 마술사를 삼켜 버리는 경우와 같다. 이런 까닭에 마땅히 모든 곳의 부처님께 깊이 부끄러운 마음을 내어 참회를 해야 한다.

참회하는 때에는 참회한다는 생각조차 내지 말아야 한다. 참회의 실상을 생각하면 참회의 대상인 죄가 이미 없는데 어찌 참회의 주체가 있다 하리오. 주체와 대상이 모두 다 성립할 수 없으니 어느 자리에 참회라는 법이 서겠는가.

 

(講說)

 

 

於諸業障作是悔已 亦應懺悔六情放逸 我及衆生無始已來 不解諸法本來無生 妄想顚倒計我我所 內立六情依而生識 外作六塵執爲實有 不知皆是自心所作 如幻如夢永無所有 於中橫計男女等相 起諸煩惱自以纏縛長沒苦海不求出要 靜慮之時甚可怪哉

 

8>

<解釋>

모든 업장에 대해 이와 같이 참회하고 나서 六情을 방일함에 대해서도 마땅히 참회해야 한다. 나와 중생은 애초부터 모든 법이 無生임을 알지 못하고 망상으로 전도되어 我와 我所를 헤아리며 안으로는 六情을 세워 거기에 의지해서 分別(識)을 내고 밖으로는 六塵을 만들어 그것이 실유라고 집착하면서 이것이 모두 내 마음이 지어 낸 것으로 꿈 같고 허깨비 같아서 결국에는 있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한 채로 이런 중에도 헛되이 남자다 여자다 하는 생각을 내어 많는 번뇌를 일으키고 그럼으로써 스스로 얽매고 묶이어 오래도록 고해에 빠져 벗어날 요체를 구하지 않았으니 가만히 생각해 보니 기가막힐 노릇입니다.

 

(講說)

육조단경에 보면 재미 있는 이야기가 있다. 중국 광주 법성사에서 인종법사가 열반경을 강의하는 중에 그때 마침 바람이 불어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 한 스님이 「바람이 움직인다」라고 하니 다른 한 스님이 「깃발이 움직인다」라고 하여 서로 토론이 그치지 않았다. 어떠습니까 정말 깃발이 움직일까요? 아니면 바람이 움직일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 행자 혜능은 명쾌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그것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당신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요」라고 설하고 있다.

깃발이 펄럭이고 있음을 보고, 「보고 있는 마음이 움직인다」고 하는 것이 보는 주인공임을 말한다. 결국 깃발이든 바람이든 움직인다고 주장하는 것은 깃발과 바람이 스스로 우리에게 움직인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들이 그렇게 말할 뿐이다. 그러므로 주관적이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마음이 만든다는 것이다. 그대로 一切唯心所造이다.

華嚴經夜摩天宮偈讚品에 覺林菩薩이 曰,

5> 비유하면 그림 그리는 화가가 6> 마음이 마치 화가와 같아서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되 능히 모든 세간을 그려내나니

마음을 말미암아 그림 그리는 것처럼 五蘊이 모두 마음 따라 生김이라

모든 존재의 성품 이와 같음이로다. 어떤 法인들 만들지 않음이 없네.

7> 마음과 같이 부처도 그러하고 8> 만일 造作하는 마음이

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니 모든 世間 만들 줄을 아는 이가 있다면

마땅히 알지니라 부처와 마음은 이 사람은 부처를 보아

본체의 성품이 모두 다함 없네. 부처의 진실한 성품을 알게되리라.

문제는 우리의 마음에 달렸다. 마음이 항상 깨어있어서 海印三昧처럼 되어있다면 유마경에서 말한 것과 같이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가 청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더러우면 바로 중생세계를 만들어낸다. 물론 똑같은 法界일지라도 마음 如何에 따라 이렇게 淸淨과 汚染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華嚴經夜摩天宮偈讚品에 覺林菩薩이 10偈頌 응당 法界의 성품위에 모든 것이 마음으로 만든 줄 관찰하라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法界 위에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는 줄을 잘 관찰한다면 三世의 모든 부처님도 바로 이와 같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즉, 華嚴經夜摩天宮偈讚品에 覺林菩薩이 10게송 만일 어떤 사람이 三世 모든 부처님을 알고자 하면 응당 法界의 성품 위에 모든 것이 마음으로 만든 줄 관찰하라라고 한 것이 이부분의 결론이다.

 

無生忍-----忍: 信受持가 忍이다 예를 들자면 「중국어를 듣고서 믿고(信) 받아들이고(受) 계속(持) 되풀이 응용(활용)하는 것이 忍이다.」 法忍은 無間道을 말함. 忍은 無間이다. 끊임 없다는 것이다.

 

<無常>에 대하여 이런 이야기가 있다. 파타챠라尼는 「持律第一」이라고 한다. 그녀는 출가 이전에는 비참하고 고난에 찬 생활을 보냈다. 「테리가타(長老尼偈)」주석서에 적힌 그녀의 출가 인연담은 다음과 같다.

 

출가하여 파타챠라라고 불린 그녀는 부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전심전력을 다하여 수행에 힘썼다.

어느날 그녀는 병에 물을 받아 가지고 와서 발을 씻은 다음 물을 버렸다. 맨 처음 버린 물은 조금 흐르다가 그쳐 버렸다. 두번째로 버린 물은 좀더 저만큼 흐르다가 그쳐버렸다. 세번째로 버린 물은 좀더 저만큼까지 흐르다가 역시 그쳐 버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맨 처음에 버린 물처럼 短命하여 요절하는 사람도 있고, 두번째의 물처럼 중

년에 가서 죽는 사람도 있다. 또한 세번째의 물처럼 장수를 누리는 사람도

있지마는, 결국에는 누구나 다 죽어 갈 수밖엔 없는 것이다.

 

그녀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에 부처님의 말씀이 귓가에 들려 왔다.

 

바로 그대로니라. 파타챠라야, 생명 있는 것은 누구나 다 죽지 않으면 안되

느니라. 몸이나 마음이나 사물이나, 모두 다 생겨났다가는 사라져 간다는 이

치를 깨닫지 못한 채 백년동안을 사느니보다는, 이 같은 이치를 깨닫고 단

하루, 아니 한 찰라만이라도 사는 것이 더 나으니라.

 

이 말씀을 들은 순간에 파타챠라는 성자의 경지에 도달했다. 이 때의 부처님의 말씀은 <법구경113(若人壽百壽,不知成敗事,不如生一日,見微知所忌. 비록 사람이 백 살을 살아도 일의 成敗를 알지 못하면, 단 하루를 살아도 기미를 보아 꺼릴 바를 아는 것만 같지 못하다.)에 기록되어 있다. 「테리가타(長老尼偈)」은 이러한 禪體驗 過程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읊고 있다.

 

저는 두 발을 씻고,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발 씻

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내려 가는 것을 보고, 저는 혈통이

좋은 駿馬를 길들이듯 마음을 가라앉혔습니다. <제114편>

그리고 나서 등불을 손에 들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누울 자리를 바

라다 보고서 침상 가까이 다가섰습니다. <제115편>

이윽고 어둠을 밝히고 저는 바늘을 잡고 등심지를 낮추었습니다. 그러자

불꽃이 스러지듯 마음은 해탈했습니다. <제116편>

 

 

猶如眠時睡蓋覆心 妄見己身大水所漂 不知但是夢心所作 謂實流溺生大怖懅 未覺之時更作異夢 謂我所見是夢非實 心性聰故夢內知夢 卽於其溺不生其懅 而未能知身臥床上 動頭搖不生其懅 而未能知身臥床上 動頭搖手勤求永覺 永覺之時追緣前夢 水與流身皆無所有 唯見本來靜臥於床長夢亦爾 無明覆心妄作六道 流轉八苦 內因諸佛不思議熏 外依諸佛大悲願力 髣髴信解 我及衆生 唯寢長夢

妄計爲實 違順六塵男女二相 並是我 --------------------

①新修大藏經 第四十五卷(鎌倉時代寫京都寶 菩提院藏本).

 

一 -- 八四二

 

 

夢 永無實事 何所憂喜何所貪瞋 數數思惟 如是夢觀 漸漸修得如夢三昧由此三昧得無生忍 從於長夢豁然而覺 卽知本來永無流轉 但是一心臥一如床 若離能如是 數數思惟 雖緣六塵不以爲實 煩惱羞愧不能自逸 是名大乘六情懺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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